홈페지

최종편집날자

2015.03.16

홈페지

 
작성일 : 15-02-05 13:06
[정치] < 조희승 칼럼 > 독도: <시마네현 고시> 40호의 진상 1
 글쓴이 : 붓꽃
조회 : 5,329   추천 : 0  

 


 

     독도에 관련한 중요한 날이 다가온다.  2 22일이 되면 일본에서는 이른바 < 다케시마(독도)의 날 >이라는 행사가 광란적으로 벌어진다. < 다케시마의 날 >은 일본사람들이 우리의 땅 독도를 제멋대로 다께시마(竹島, 독도의 일본식 발음)라고 부르면서 독도를 자기땅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소동을 말한다. 독도가 일본에 비법적으로 < 편입 >된 것은 1905 2 22< 시마네현고시 > 40, 이른바 독도편입조치 발표한 이후이다. 20052 22일 고시발표 100년에 즈음하여 시마네현의회는 < 다케시마(독도)의 날 >조례를 제정해 놓고 줄곧 영토적야욕을 추구해 왔다.

 

올해 2015 2 22일은 <시마네현고시 > 40 발표 110년이 되는 해이다. 따라서 이에 초점을 맞춰 일본에서의 연례적인 소동은 큰 규모의 양상을 띠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이러한 시점에 < 독도이야기 >(2007)를 쓴 필자는 다시한번  < 시마네현고시 > 40호라는것이 어떤 시대적배경을 가지고 나오게 되었는지 그 숨겨진 진상을 해부해 봐야 한다고 생각하고 붓을 들었다.

 

* * *

 

지금으로부터 50년전에 한일회담이 있었다. 그때 제일가는 걸림돌이 독도문제와 문화재반환문제였다. 정치적, 경제적타결은 5달러의 < 경제원조 >와 < 독립축하금(배상금이 아닌) >으로 마무리되었다.

 

< 김-오오히라 메모 (1992 6 22일자 동아일보에 원문게제) >에 대변되는 정치적흥정과 타결로 일단락 되었으나 문화재반환문제와 독도문제는 쉽사리 해결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일본측에서는 < 그따위 바위섬 하나 폭파해 버리라 >는 폭언까지 튀어나올 정도였다. 끝내 타결이 이룩되지 못하였던 독도문제가 다시금 부상되게 되었다. 그것은 독도주변해역이 풍부한 어장이라는것과 무진장한 천연가스 등이 매장되어 있다는 새로운 인식 때문에 일본의 탐욕적인 영토적요구가 다시금 머리를 추켜 들게 된 것이다.

 

그와 맥락을 같이 하여 각종 교과서들에 독도가 역사적, 국제법적으로 자기네 일본땅이라는 내용을 새겨박으면서 그것을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주입시키고 있다. 실례로 비교적 최근시기 (2013년이후) 사용되고있는 일본교과서인 지유샤(自由社) < 새로운 공민교과서 >(중학사회2012)와 이꾸호샤(育鵬社) < 새로운 모두의 공민 >(2013)를 통하여 잠간 드려다 보면 그 내용이 다음과 같다.

 

지유샤의 < 새로운 공민교과서 >(145페지)에는 독도에 대한 지도를 게시하면서  일본에는 영토문제, 영토분쟁이 있다고 단정하고, 그것은 북방영토문제와 다케시마(竹島-독도)문제 그리고 센카쿠열도(조어도)분쟁문제라고 못 박았다. 그러면서 이 섬들은 모두 < 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 우리 나라(일본)의 고유한 영토 >라고 단정하면서, 러시아와 남(한국)이 불법적으로 점거한 것이라고 < 불법무도성 >을 강조하였다.

 

이어 149페지에는 < 다케시마 - 남(한국)이 점령중 >이라는 제목을 달고 < 에도시대부터 우리 나라(일본)가 영유함 >라는 < 사적근거 >를 서술한 다음, 래 사람이 살수 없었으나 에도시대때부터 돗토리번(鳥取藩) 사람이 막부의 허가를 받고 어업을 하고 있다가, < 1905년 국제법에 따라 시마네현에 <편입>된 이후 실효지배를 진행해 왔다 >고 쓰여져 있다.

 

공민교과서의 마감책장에는 독도사진을 크게 제시하고 < 다케시마(竹島) - 다케시마는 에도시대때부터 우리 나라(일본)영유하고 있었지만 1952년부터 남(한국)이 불법점거하고 있다 >고 사진을 설명하였다.

 

또한 2014년도부터 사용되고있는 시매품교과서 < 새로운 모두의 공민 > 교과서 157페지에서는 독도와 일본영역을 크게 확대한 지도를 제시한 다음 일본외무성의 웹싸이트내용이라면서 < 시마네현 오끼제도의 북서에 위치한 다케시마(독도)는 일본고유의 영토입니다. >고 박아 단정하고 있다.

 

< 공민 >(公民)교과서라는 것은 옛날에 < 사회 >라고 불리던 교과목으로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공민이 될 자질을 갖추기 위하여 알아야 할 내용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위 교과서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일본이 독도가 일본땅이라는 것을 ①에도시대때부터 독도를 돗토리번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는 < 사적근거 >와 ② 1905년의 < 시마네현고시 >를  < 국제법적근거 >로 삼고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따라서 이 두가지 < 근거 >가 허물어지면 일본의 주장 역시 물먹은 담벽처럼 허물어지는 것이다.

 

에도(江戶-오늘의 도꾜)시대란 도쿠가와 막부가 통치하는 시대라는 뜻으로 에도막부시대, 도꾸가와막부시대라고 부른다. 1603년부터 1867년까지 264년간을 말한다. 일본교과서들에서 언급된 에도시대때에 독도가 일본땅이었다는 것은 1693년부터1699년까지 있었던 안용복사건을 위시로 한 일련의 영토분쟁사건을 염두에 두고 말한다. 그런데 안용복사건은 독도가 일본땅이였다는것을 증명하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독도가 역사적으로 조선땅이었다는것을 웅변으로 보여주는 역사적사건이었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안용복사건을 함축해서 말한다면 다음과 같다.

 

1693년 울산에서 살던 안용복은 일본어에 능하였다. 동료어부 40여명과 함께 울릉도에 갔다가 거기서 비법적으로 물고기잡이하는 일본어부들을 발견하고 여기는 우리땅이라고 그들을 내쫓으면서, 울릉도와 독도에 침입한 일본어부들을 내쫓기 위해 직접 일본어부들의 출신지인 호키주(百耆州)등지에 가서 독도가 조선의 땅임을 주장하였을뿐아니라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의 영토>라는 서계 즉, 일본이 다시는 울릉도와 독도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에도막부의 담보서까지 받아왔다.   안용복사건은 조선에서 소설과 TV시대극으로 각색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단행한 안용복의 상상을 초월하는 영웅적행위에 대하여 의문시하는 이들도 있으나 그것은 당시의 역사기록들인 < 숙종실록 >과 < 증보문헌비고 >, 리이의 < 성호새설 > 그리고 일본측기록들인 돗토리(鳥取藩)에 전해오는 기록장, < 죽도고 >(竹島考), < 인부년표 >(囚府年表)등에 기록되어 전해오기 때문에 의심할 여지가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안용복이 1693년봄(3)에 울릉도에서 만난 일본어부들이 탄 배는 호키번(伯耆藩 오늘의 돗토리현으로서 돗토리번이라고도 한다.)의 요나고(米子)에 사는 오오다니(大谷)가문과 무라가와가문의 배였다. 용복은 박어둔 등과 함께 일본배를 타고 오끼섬을 거쳐 호키번주와 만났다. 키번주는 안용복을 후하게 대접하면서 은덩어리와 재물로 그를 매수하려고 하였으나 < 나는 다만 일본이 다시는 울릉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물건을 받는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 >는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 안용복앞에 쩔쩔 매었다. 키번주는 끝내 막부 < 쇼궁 >에게 품하여 서계(문건)를 만들어주지 않을수 없었다. 서계에는 < 울릉도는 일본의 지경이 아니다 >고 명백히 밝혀져 있었다고 한다. 이때 호키번주가 조선의 영토로 인정한 것은 울릉도뿐아니라 독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은 < 울릉도와 그밖의 한 섬 > 즉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에 대한 확인이었다.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영유권문제가 복잡해지자 중앙정부인 도꾸가와막부는 돗토리번에게 안용복사건이 어떻게 된 것이냐 물어보았다. 말하자면 에도막부라는 중앙정부가 지방소국당국인 돗토리번에게 울릉도, 독도의 두개섬이 당신네 번의 땅이 옳긴 옳은가 하고 질문을 한 셈이다. 이에 대하여 돗또리번은 < 아니올시다. 사실 그 두섬은 조선의 섬인데 다만 요나고(米子)에 사는 오오다니(大谷)와 무라가와(村川)가 하도 간청하기에 몇십년전 마쯔다이라 싱따로(松平新太郞)가 나라를 다스릴 때 막부의 허가증을 주어 섬에 왕래하면서 고기잡이를 한데 불과한것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토리번의 회답에 기초하여 막부는 1696 1 28일 마침내 울릉도, 독도의 조선영유권을 공식인정하는 다음의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8.jpg


 

< 죽도(竹島-여기서는 울릉도)가 이나바번(因幡 돗토리번이나 같음)에 속한다 하더라도 우리 나라(일본)사람들이 산적은 없고 요나고사람들이 그 섬에서 고기잡이를 하겠다고 청원하기에 그것을 허용했을 뿐이다. 또 지리를 헤아려보건대 이나바번에서는 160(일본리수, 조선리로는 1600), 조선에서는40(조선리로 400)쯤 되니 일찍부터 저 나라의 지경인것이 분명하다. …당초에 이 섬을 저 나라에서 빼앗은것이 아니니 지금 또 돌려준다고 말할수 없다. 단지 우리 사람들이 고기잡이를 가지 않도록 금지하면 될뿐이다. … 마땅히 이러한 뜻을 저 나라(조선)에 말해주어야 할것이다. >(<통항일람 >[通航一覽]137, 27페지)  <통항일람 >이라는 것은 에도막부가 막부의 외교기록을 묶어놓은 책이다. 모두 350권으로 되어있으며 1566년부터1825년까지의 사실을 엮은것이다.

 

막부의 이 결정에 의하여 왜인들의 울릉도, 독도에로의 왕래는 취소되었고, 지금껏70~80년간에 걸쳐 어부지리를 얻어 온 오오다니와 무라가와가문은 큰 타격을 받아 보따리를 싸들고 이즈모(出雲 호키주의 인접, 오늘의 시마네현)에로 솔가이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9.jpg

 

여기서 잠간 설명하고 넘어갈 일이 있다. 그것은 막부와 호키번(토리번)과의 관계이다. 앞에서 본 마쓰다이라 신타로라는 것은 이케다 미쓰마사(池田光政1609-1682)를 가리킨다. 그는 외가쪽과 처가쪽으로 당시 국왕이었던 막부 <쇼궁>과 인척관계가 있어 막부와 막역한 사이에 있었다. 그리고 1632년 그 후임으로 32만섬지기 이나바 돗토리성주가 된 이께다 미쓰나까(池田光仲1630-1693)역시 <쇼궁>집안과 가까운 관계에 있었다. 쓰마사의 미쓰()나 미쓰나까의 미쓰()는 다같이 당시의 3 <쇼궁>도꾸가와 이에미쓰(家光)의 한글자를 하사해 받아 지은 이름들이다. 따라서 1600년대때의 이나바 돗토리번에 군림한 번주(영주)들은 중앙정권인 막부 도꾸가와 <쇼궁>의 의향에 철저히 충실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지 않아도17세기는 도꾸가와(에도)막부의 권위는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지방정권은 막부의 지시에 대하여 꼼짝소리 못하고 절대복종하였다.

 

1696년 여름(숙종 22)정확하게는6월 안용복은 두번째로 일본에 건너갔다. 그때 안용복은 <조울량도감세장신안동지기>(조선 울릉도 우산도 두 섬의 조세를 감독하는 관리 신 안동지의 일행)이라는 깃발을 띄우고 갔다. 용복은 <전번에 두 섬의 문제로 확인문서를 받아간 것에 대해서는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요. 그런데도 쓰시마도주가 문건을 빼앗고 중간에서 위조하여 계속 차왜를 파견하여 우리의 영토권을 함부로 침해하고있소. 내 이제 관백(막부《쇼궁》)에게 글을 올려 죄상을 낱낱이 고발하려고 하오.>

 

호키번주는 전에 있었던 일을 잘 알고 있었고 이번 일이 쓰시마와 직접 관계되는 일이므로 그것을 허락하였다. 쓰시마가 문건을 빼앗았다고 한것은 이나바 호키주가 안용복에게 에도막부에 품해서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땅이 아니라 조선땅이라는것을 확인해 준 문건(서계)이다. 그것을 쓰시마왜인들이 안용복이 쓰시마를 거쳐 조선에 갈 때 감금해 놓고 도중에서 문건을 가로챈 사실을 가리킨다.

 

안용복일행이 쓰시마왜인들의 간계를 적발하겠다는 소문을 들은 에도에 살고 있던 쓰시마도주는 호키번 번주에게 애걸복걸하면서 제 자식을 살려달라고 빌었다. 쓰시마의 간청을 외면할 수 없었던 호키번주는 전날 조선지경을 침범하였던 왜인들을 처벌하고 안용복에게 다음과 같이 확약하였다.

 

<두 섬(울릉도와 독도)이 이미 당신네 나라에 속한 이상 후에 다시 비법적으로 넘어가는자가 있거나 쓰시마도주가 함부로 침범한다면 어떤 경우이던 국서를 작성하여 역관을 들여보내면 마땅히 엄중히 조처하리다.>

 

호키번주는 안용복일행에게 길 양식을 공급해주고 사신을 정하여 호송하게 하였다. 일행은 강원도 양양에 도착하였다. 무능한 통치배들은 의로운 일을 한 안용복일행을 극형에 처하려 하였으나 그의 공적을 무시할 수 없어 귀양정배살이로 마무리 짓도록 하였다.


11.jpg


 

조선봉건정부는 안용복을 체포한 다음 안용복의 공술내용과 쓰시마번과의 외교접촉을 통하여 울릉도,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다시금 확인하였다. 이에 대하여 < 숙종실록 >이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았다. 조선측은 일본이 말하는 다케시마(죽도)라는것은 조선의 울릉도이고 그것이 조선령이라는 것은  <동국여지승람>에 게재된 것이고 일본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고 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왜(쓰시마번의 사신)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문구가 어떻다저렇다고 수정을 요구해 왔으나 이번에 (막부가) 도해금지를 발령한 것은 쓰시마번의 알선에 의한 공이다고 춰준 다음 안용복이 호키에 가서 소원한 것은 정부가 알바가 아니니 감히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1698예조의 서계(문건)를 일본 쓰시마도주에 보냄으로써 울릉도사건이 낙착된 데 대하여 통지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내용의 서계가4 27일에 예조참의로부터 쓰시마도주에 발송되었다. 간사한 쓰시마왜인들은 자기들이 알선해서 울릉도, 독도가 조선땅이 된양 누차 강조함으로써 이속을 챙기려고 하였다. 조선정부는 실지로 백미 열여덟가마니를 쓰시마에 보냈다. 예조의 서계는 10 19일 막부에 전달되었다. 막부의 우두머리 아베(老中阿部豊後守)가 서계를 접수하였다는 취지를 쓰시마에 전하였다.

 

아무튼 안용복사건으로 인해 일본측은 1699년말을 끝으로 이제까지 호키(토리번)가 발급해주던 <도해면허증>을 취소하고 울릉도,독도가 조선소유라는것을 인정하고 이 사건을 단락지었던 것이다.


7.jpg



< 2편에 계속>


twitter로 보내기 facebook으로 보내기 구글로 북마크 하기 네이버로 북마크 하기